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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난 후

by bluesky37 2025. 6. 29.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어떤 강렬한 결론을 주는 책이라기보다, 읽는 동안 마음속에서 작은 물결이 일어나고, 읽고 나서는 조용히 가라앉는 책이었다. 그 여운이 가시기 전의 생각들을 기록해 두고 싶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책사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1. 익숙했던 세계가 낯설어지는 순간

책을 읽는 동안 처음 느낀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어린 시절,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느끼는 위화감이 이상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도 어릴 적, 이유 없이 어떤 말이나 규칙에 의문을 품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땐 그냥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데미안』 속 싱클레어는 그 감정을 붙잡고 파고들었다.

어떤 장면은 꼭 꿈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현실처럼 또렷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정서가 겹쳐져 있었다. 데미안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친구라기보다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꿰뚫어 보는 듯해서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그 불편함이 계속 읽게 만들었다.

이 책은 어쩌면 성장기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밝음과 어둠을 명확하게 나누려는 마음, 그 안에서 혼란을 느끼는 감정, 그리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지기 어려웠던 기억들이 문장 틈 사이에 계속 떠올랐다.

2. 데미안은 누구였을까

읽는 내내 마음 한편에 계속 남았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데미안은 누구였을까.” 어떤 장면에선 누군가를 닮은 친구처럼 보였고, 또 어떤 장면에선 나 자신 안의 목소리 같았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분명한 건 그가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흔들림 없는 눈빛, 세상과 거리 둔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존재이기도 했고, 상태이기도 했던 것 같다. 더 이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어떤 상태. 그러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는가. 누군가를 따라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기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작중의 데미안은 끝내 어떤 확실한 정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의문만 남긴다. 그런데 그런 의문이 이 소설을 오래 마음속에 남게 만드는 것 같다.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울림 같은 것.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무엇을 감출 수 있을까.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질문은 남는다.

3. 알을 깨는 일에 대하여

책 속의 가장 상징적인 문장은 역시 ‘알’에 대한 이야기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 문장은 읽는 순간보다 다 읽고 난 후, 더 자주 떠올랐다. 지금까지 내가 속해 있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알이라고 믿었던 건 어쩌면 그냥 익숙한 안쪽이었는지도 모른다.

알을 깨는 건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책 속의 싱클레어처럼 나도 몇 번은 그 알의 벽을 두드려봤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은 다시 안으로 숨었고, 또 어떤 시도는 벽을 흠집만 내고 끝났다. 그래도 계속 그런 시도가 있었던 걸 떠올리게 되는 책이었다. 작고 사소한 충돌들이 결국 나를 이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데미안』은 어떤 확신을 주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남겼다. 그런데 그 질문이 오랫동안 나를 따라왔다. 조용히, 가끔 떠오르는 문장처럼. 책을 읽는 시간보다, 책을 덮고 나서 며칠 동안 생각이 더 많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마음 안쪽에서 무언가를 계속 두드리는 느낌. 그게 이 책의 여운이었던 것 같다.

마무리
『데미안』은 감정을 요동치게 하진 않았다. 다만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감각들을 조용히 일으켰다. 어떤 시기에는 이런 책이 오히려 크게 다가온다. 그저 지나가는 시기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읽고 남겨두고 싶다.